칸토어(1845~1918) 19세기말 수학계에 큰 파란을 일으킨 집합론의 창시자 칸토르는 집합의 개념이 초ㆍ중등학교의 수학에 들어올 정도로 친숙한데 비하여, 지금부터 80년 전에 슬픈 운명을 안고서 정신 병원에서 생을 마쳤다.
칸토르는 1845년 3월 31일 소련의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인 와르데마루는 부유한 유태인 계통의 상인이었는데 젊었을 때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였으며 그의 모친인 마리아는 예술가 기질이 있는 카톨릭 신자였다. 그의 부친이 1856년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 이사하였고 칸토르도 부친과 같이 독일로 이사한 후 계속 그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칸토르를 독일의 수학자라고 생각하게 된다. 칸토르는 중ㆍ고등학교 시절 수학 성적이 아주 우수하였다. 1863년 그는 스위스의 쮜리히 대학에 입학하였는데 그의 아버지가 폐병으로 작고하였기 때문에 다음 해에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 와 수학, 물리학, 철학을 공부하였다.
그런데 물리학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전적으로 수학과 철학을 공부하게 된다. 그는 수학과 철학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집합론을 형이상학이라고 여긴 것은 로마의 에세르(Thomos Esser)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수학의 원리 및 자연 과학의 원리를 세우는 일은 형이상학의 책임이며 일반 집합론은 형이상학에 속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구절에서 알 수 있다. 칸토르가 공부하였던 베를린 대학은 게팅겐 대학과 함께 수학의 중심지였고, 그 곳에는 쿰마(1810-1893), 바이어스트라스(1815-1897), 크로네커(1823-1891)가 있었다. 그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은 바이어스트라스와 크로네커이다. 그는 대수학자 크로네커의 수론(數論)의 강의에 매력을 느꼈고 가우스의 수론을 연구하여 논문을 제출하여 1867년 학위를 받았다. 그 뒤 베를린의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869년 봄에 하루레 대학에 부임하여 1905년까지 그 대학의 교수 생활을 하였다.
칸토르의 창조적 활동기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기(1871-1884)는 명쾌하고 생동감 있는 강의와 집합론을 열정적으로 연구하였다. 집합론이 처음으로 모습을 보인 것은 크렐레 논문집(Crelle Journal)에 실린 「대수적인 실수의 집합에 대한 한 성질」이다. 여기에서 대수적 수, 가부번집합, 아레프널의 용어가 나온다. 그런데 1878년에 크렐레논문집에 \"집합론의 한 고찰\"을 제출하였는데 편집실에서 발표를 억제시키는 바람에 그를 괴롭게 만들었다. (이것은 1784년에 크로네커가 크렐레논문집의 편집위원장이 된 후 칸토르에 대한 편견 때문에 발표를 억제시킨 것이라 생각된다.)
칸토르와 크로네커와의 대립은 점점 깊어 가기 시작한다. 직관주의자인 크로네커는 칸토르의 집합론의 생각은 수학의 위기를 가져오는 것으로 보았고, 독일 수학계에서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 크로네커로부터 궁지에 몰린 칸토르는 정신병으로 시달림을 받는다. 칸토르의 전기(傳記)를 쓴 프렝켈(Fraenkel)은 논문 「일반 집합론의 기초」에다 특별히 주를 달았는데 "수학이나 철학의 분야 뿐 아니라 그 중요성은 과학과 인간 사고의 역사에 필적할 만한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 칸토르가 발표한 집합론의 정당한 평가는 집합론이 수학의 기초와 깊은 관계가 있는 문제라는 것이 인식되면서 칸토르의 이름은 크게 부상(浮上)하기 시작한다. 칸토르는 1878년 게팅겐 과학협회의 통신 회원이 되었는데, 이것은 하루레 밖의 지역에서 처음으로 인정받은 것이었다.
1897년에는 제1회 국제 수학자 회의가 쮜리히에서 개최되었는데 그곳에서 칸토르의 공적이 널리 인정되었다. 또 1901년에는 런던 수학회의 명예 회원으로. 1902년에는 크리스티나 대학 및 성 앤드리우스 대학에서 그에게 명예 학위를 보내 주었고 1904년에는 런던 왕립 협회로부터 실베스터 메달 (Sylvester Medal)을 받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가 전성기로 활약했던 시절에 그의 업적을 인정하지 않고 시골의 하루레에서 지내도록 한 것은 칸토르에게 너무도 큰 타격을 준 것이 틀림없다고 본다.
민코우스키(H. Minkowaki)는 "미래의 역사는 칸토르를 그 시대의 가장 깊은 사상을 갖고 있는 수학자의 한 사람으로 볼 것이다.\"라고 하였고, 힐베르트는 칸토르가 구축한 낙원을 잃지 않도록 하자고 말하였다. "수학의 본질은 그 자유성에 있다." 고 한 칸토르의 집합론은 혁명적이었으나 그의 사고는 큰 시련도 있었다.
나이 들어 자주 병이 재발한 것을 아쉽게 생각하며 1918년 1월 6일 하루레의 한 정신 병원에서 비운의 천재는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